은행잎

스물일곱해, 아직도 중간고사에 치이며, 그 핑계로 군대가는 친구에게 전화도 못한 못난 나.

아침에 거울 속의 나를 보다가 내 몸에 붙은 핑계들을 칼로 깎아내고 싶어 면도날을 들었다가 놓는 나.

억지로 웃는 연습을 하다가도 미간에는 이내 고집만 쌓여 주름이 진 나.

다섯 해, 그리고 세 해, 한동안 못보다가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'이제 더 이상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구나.' 라고 깨닫는 나.

정신을 차려보니 나보다는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그걸 핑계로 삼는 나.



동기들 틈에서 열등감을 느낄 때, 무대에 올리고 싶은 음악이 머리 속에서 맴돌 뿐 밖으로 나와 주지 않을 때, 설 익은 연두색 은행잎이 귀 끝을 스치는 것처럼 지나간 시간이 명치 끝을 날카롭게 칠 때, 손발을 묶인 채 우물에 빠진 것처럼 답답하다.

by 맨손 | 2008/11/01 00:02 | Article | 트랙백 | 덧글(0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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